넌 말이 없었었지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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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죽고싶어 한다는 걸 아무도 믿지 않으니까

춤추는 기린 2019. 7. 29. 14:59

삶의 단절과 영속성에 대하여.

 

ㅁㅁ언니를 처음 만난 것은 너무 까마득해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는 일주일에 네다섯 번은 거리에서 술을 마셨으니까. 친척들의 폭력을 피해 절로 숨어들었다가 겨울이 지나면 혹은 크리스마스가 오면 종종 대구로 돌아오던 언니는 술을 잘 마시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은 우리 친구들 중에 드물었다. 우린 제각각 다 못났고 못됐고 아무튼 못돼 쳐 먹었다. 나는 언니가 좋았고 자주 만나진 않았지만 어쨌거나 우리가 가는 곳은 꼬뮨 아니면 오르간, 정해져 있었으므로 한 달에 대어 번은 만나곤 했다. 

 

나는 뭘했더라 그즈음 영화를 구상했나. 음악을 하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내게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네가 죽고 싶다는 말을 아무도 믿지 않고 같잖게 생각하니까 그만 말하라"라고 하고는 연을 끊었다. 그랬군 건조하게 대답했지만 몹시 괴로웠다. (이때쯤 이미 자살 시도로 몇 번 입퇴원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나는 멋모르고 그녀에게 몇 번 죽고 싶다고 말했다. 반대로 그녀는 자신의 무엇이 내 덕분에 살아났다며 갑자기 전화를 걸어 약간 환희에 가득 찬 목소리로 (생략)

 

그들은 세상을 향해 단 한톨의 위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취약하고 안타까운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엉망이었고 폭력적이었고 개판이었고. 왜 그렇게 사냐고 두들겨 패 버리고 싶을 정도로 한심했다. 왜 그렇게 사냐고? 돈이 없으니까 그렇게 살겠지. 나는 돈이 있었지만 그렇게 살았다. 두들겨 맞아야 하는 것은 사실은 나였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저질렀던 모든 멍청한 짓과 타인을 향한 폭력들, 언어, 무지함, 자해, 상처주기, 데이트폭력, 무시 혹은 진짜로 주먹다짐과 머리털 쥐어뜯기가 오갔던 것들 나의 모자람, 멍청함, 병적인 것들의 발현 그것들이 찐득찐득하게 얽혀있는 나는 그 모든 것들의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했다.

 

미투 그게 뭐냐 겁대가리가 없이 남자 집에서 잠을 잤던 것도 나였고 그 모든 소동을 벌인 것도 나였다. (혹은 나의 병이었다.) 1인 릴레이 시위를 기획한 것도 나였고 자보를 쓴 것도, 활동을 시작한 것도, 전시회를 열었던 것도, 영화를 만들었던 것도, 여러 사람들을 조직해서 끌어들였던 것도 그들을 폭력에 내버려둔 것도, 스스로를 폭력으로 내몬 것도, 모든 걸 세우고 부수고 세우고 부수고 그 모든 것들이 내가 한 짓이었고 그것들은 하나하나 모두 나였고 나였고 나였고 나였다. (연쇄적으로 멍 멍 멍 멍 짓는 15마리의 큰 개를 떠올려보라.)

 

그곳에서 도망치기 위해 나는 세탁을 하듯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을 왔지만 어느 지점에서는 여전히 당연하게 그들과 끈질기게 연결되어있었으며 그 사실은 날 여전히 불안에 떨도록 했다. 새 삶이 적응되지 않을 땐 이상하게 다시 그곳으로 발길이 돌아갔다. 갈 수만 있으면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저 그 거리에 가만히 서있는 것 만으로 완전히 개박살 날 수 있는 모든 기회들, 그러니까 술, 약, 담배, 전 여자 친구, 모르는 사람과의 섹스, 토, 시끄러운 음악, 차가운 바닥, 월세집, 미래가 없는 30대의 외국인 강사들과의 원나잇이 주어질 것을 알고 있었다.

 

2013? 2014년 언젠가 크리스마스 근처의 만남을 마지막으로 언니는 영원히 대구를 떠났다. (그랬는진 모르겠다 아무튼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여름이면 절에서 내려온다던 언니의 생사를 여전히 모른다. 그녀도 나를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이 불안해질까? 나는 여전히 그녀를 떠올리면 막걸리집의 시큼 쿰쿰한 냄새와 시다 못해 혓바닥이 아리도록 삭아버린 깍두기의 맛이 입과 코를 맴돌았다. 살아있을까. 

 

나는 내가 변하지 않았을까봐 무섭다. 영원히 변할 수 없을까 봐 무서웠다. 그 넝마를 주워 입고 추위에 떨며 거지 같은 글과 그림을 쓰고 그리고 집회에 나가고 술을 마시고 뭔가를 했다는 그 공허한 뿌듯함을 주워 담는 거기에서 한 발짝도 멀어지지 못했다면 어쩌지. 그들은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있지만 아직도 여전히 그런 삶을 살더라 아니 더 절망에 가까워졌더라. 그것들은 좋아 보이고 매력 있어 보인다. 나 역시 하염없는 절망의 터널로 걸어 들어가고 싶다. (그리고 돈이 없으면 나도 그렇게 될 거다.) 이전에 우리를 떠난 어떤 친구를 나는 안다. 그 친구는 여러 번 다시 우리들의 거지 같은 곁으로 돌아올 뻔했지만 그러지 않았으며 심지어 우리들과 단절하고 또 연결되면서도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도 잊지않고 있다. 나는 그만 그렇게 당신들과는 다르게 되어버렸다. 안타깝지만 내게는 다른 삶의 선택지가 있었던 것이다. 극의 주인공이 아니라 관객이라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킨다.  

 

내 단절은 타인으로부터 왔고 연속은 나로부터 출발한다. 반대로 언니의 연속은 나로인해 여전히 계속되고 단절은 그녀로부터 시작된다. 단절이 내게 새 기회를 준 것만 같이 느껴질 때를 경계한다. 다만 끝이있다는 절박한 믿음만이 나를 이끄는 동력이자 기쁨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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