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말이 없었었지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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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존재

춤추는 기린 2020. 2. 25. 13:54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늘은 정신병이 저를 사랑하고 제가 정신병을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 기술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그 모든 것을 넘어서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한 가지는, 제가 가장 힘들고 괴로울 때 제 곁을 유일하게 지켜주는 다정한 존재는 오직 정신병뿐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정신병에 목이 졸려 죽지 않기 위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습관을 길러야 하고 약도 먹어야 하고 돈 버는 기능도 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할 밖에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것에 목 졸려 죽는 기쁨을 처절하게 거절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선생님, 정신병이 무엇일까요? 정신병의 형태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할 수 있냐고 물으면 저는 어렸을 때 그것을 '수은'이라고 떠올렸었고 지금은 팔다리가 달린 한송이의 '코스모스'를 떠올립니다. 꽃은 아름답고 자애로우며 오직 저를 위해서만 존재하지요(물론 아닐 겁니다). 제가 저를 쓰레기처럼 다루며 매일 시궁창에 제 신체와 정신을 내다 버려도 정신병은 저를 주워서 씻기고 입히고 먹이며 기릅니다. 제가 이런데도 정신병을 미워할 수 있을까요. 정신병은 실체입니까? 아니면 저의 장애입니까, 아니면 저의 결핍입니까, 아니면 저의 과다입니까? 어쨌든 제 기능의 여기저기가 망가지고 고장 나더라도 정신병은 절대 저를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최후의 최후의 최후의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요.

 

저는 지금 당장 옷장 정리를 하고 싶어요. 업무시간 중이고 중요한 업무를 하는 도중이며 곧 회의가 있고 이 자리를 벗어 나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집으로 돌아가 옷장의 옷을 이것저것으로 분류하고 버리고 세탁하는 일만을 계속해서 상상하느라 정작 해야 할 중요한 업무는 조금도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옳지 못한 충동과 욕구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옳고 또 반대로 옳지 못한 충동이란 무엇인가요. 제가 지금 집으로 돌아가 옷장을 정리하는 것이 누군가와 자신에게 위해가 됩니까? 아닐 것입니다. 제가 돌아가서 옷장 정리를 해도 해는 동에서 떠서 서로 지고 사람들은 일하고 지하철은 운행되고 회사는 돈을 법니다. 전혀 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종종 이런 욕구를 엄청나게 또 자주 느끼는데 (예를 들면, 외출 전에 헤어드라이기가 연결된 콘센트의 코드를 뽑았는지, 냉장고의 문은 잘 닫았는지, 샤워기는 껐는지 등등을 확인하려고 출근길에 집으로 되돌아간 사례가 많습니다) 이 욕구를 충족하려고 계속해서 조퇴를 하다 보면 전 근태가 불성실한 직원이 되어 직업을 잃게 되겠죠? 냉장고의 문이 닫혔는지를 확인해야 하니 조퇴를 허가해주십시오 라는 말을 정신병과 저 말고 누가 이해를 해줄 수가 있겠나요. 

 

결국 행위의 옳고 그름이란, 자본주의의 이득과 동의어가 아닌지에 대해서 자꾸만 고민하게 됩니다. 우리가 흔하게 정신병/정신질환/정신장애 어쩌고 기타 등등의 판단 기초로 삼는 '일상 불편감'이란 결국 자본주의의 피착취자가 되기에 훌륭한 재질과 기능을 적절히 갖추지 못하고 있거나 혹은 -저처럼- 그것을 가진 것처럼 둔갑할 수 있는 능력이 없거나 혹은 두 가지 다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자본에게 동정 받을만한 불행을 겉으로 드러낼 여력이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다만 정신병자들의 일부 혹은 대다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기에 적합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사실에 어떤 사람은 위로 받고 어떤 사람은 절망합니다. 우리는 아마도 병의 경중을 떠나 어떠한 형태로든 성실한 근로자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정신질환자의 원래의 형태 즉, 아프고 게으르고 무기력하고 예민하고 불규칙적이며 예측 불가하고 비효율적이고 비용이 많이 소요되고 때때로는 반사회적이기 까지 한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해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병원에 들르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ADD 환자와 양극성정동장애 환자가 오랜 시간 책상 앞에 머물러 있길 바라는 사람은 환자 당사자입니까 아니면 의사입니까. 우리는 다루어져야 하는 존재로 남아야 하는 것일까요? 정신병과 그 정신병의 배우자인 정신병자의 기질을 치료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 해가 됩니까? 어쩌면 질문해서는 안 되는 질문을 허공에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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