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말이 없었었지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 처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본문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춤추는 기린 2018. 10. 22. 11:20

어제는 교중미사에 참석하였다. 내 대각선 앞 쪽으로 직장동료가 두 아이와 아내를 데리고 또 부모를 모시고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갑자기 그게 너무 부러워서 눈물이 났다. 또 한편으로는 사람의 욕심이란 정말 끝도 없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어떤 사람은 가정을 꾸릴 권리조차 없는데 나는 배우자라는 가족을 가지고도 또 욕심을 내는구나 자신이 몹시 추하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내 탓 같고 죄책감이 든다. 배우자는 이제 내가 원하는 대로 전혀 움직여 주지 않는다. 자신이 해야하는 것과 하고싶은 것을 한 다음 여유가 있는 약간의 시간만을 내게 내어줄 뿐이다. 언제고 나를 외면하다가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면 화를 내거나 끈질기게 졸라대거나 한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도 다 나의 책임 같다. 심지어 미사 시간에 영성체를 받아 모시면서 신부님이 내 손바닥을 꾹하고 눌렀는데 미사에 일찍와서 준비하지 않은 나를 탓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나중에 이 이야길 배우자에게 했더니 미사 중에 노인들의 핸드폰이 울려대서 화가났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수백명의 신자를 앞에 둔 신부님이 나 한 명만을 보고 있을리가 없잖은가. 하지만 나는 그렇게 느껴졌고 그게 아니라는 걸 판단하기 위해서는 어떤 객관적 지표들(그날의 미사 중에 유난히 핸드폰 벨소리가 끊임없이 울렸고 강론 시간에 신부님은 그것에 대해 화를 내었다.)보다 믿을 만한 타인의 의견이 필요했다.


돌아와 다른 볼일로 재차 집을 나가기 전 구불구불해진 옆 머리를 펴기 위해 고데기를 켰다가 머리 손질을 마치고 전원을 끄고 서랍에 넣었다. 거기까지는 확신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앞머리를 굽은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서 다시 그것을 꺼냈고 전원을 켜지 않고 남은 열로 머리를 말았다. 그리고 또 서랍에 넣었다. 이때 내가 정말 전원을 켜지 않았는지 도저히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나는 현관문을 닫고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지나 인터뷰를 하러 갈때까지 그 고데기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고장나서 저절로 켜지거나, 서랍에 넣으면서 어딘가에 걸려 스위치가 눌러지지는 않았을까? 또는 내가 껐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집에 돌아가면 두 고양이는 연기에 질식해서 죽어있고 모든 가구가 물에 젖어있지는 않을까. 그것에 대해 상상하느라 좀처럼 아무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물론 알고있다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결국 집에 급하게 돌아와 화장대 서랍에 얌전히 잠을 자고 있는 그것을 보고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이 짓을 매일 출근할 때마다 반복한다. 나는 샤워기를 껐는지. 가스벨브는 잠궜는지. 고양이가 옷장에 갇혀있진 않은지. 헤어드라이기는 껐는지. 이것을 확인하느라 집을 세바퀴쯤 돌고 가끔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직장에 도착했다가 다시 집에 돌아가기도 한다. 도저히 여건이 안될때면 배우자에게 가서 확인해달라고 매달리기도 한다. 이짓거리를 계속 반복하면 정말 지친다.


내가 감히 내 세계의 바깥을 고민할 여유가 있을까?


나는 아주 오랫동안 고장나 있었고 그것을 어떻게 고쳐나가야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 정확히 어느 시점부터 시작인지도 가늠이 되지 않고 무엇을 치료해야할지 모르겠다. 가만히 누워 되돌아보면 내 인생 전체가 잘못 끼워맞춰진 얼기설기한 퍼즐같다. 잘 모르겠다. 내가 이상한 것인지? 객관적으로 슬프거나 화가나거나 해야하는 상황이 맞는 것인지. 모든 것을을 과장되고 왜곡되게 받아들이고 있는걸까? 아니면 내가 느끼는 감정과 의구심들은 충분히 그럴만한 상황에 있는 걸까?


'진짜 문제'는 뭘까. 남들이 이야기하는 '충격적인 사건들'을 정신과 의사에게 고백할 수 있으면 나는 치유되는 걸까? 나는 아주 많은 의사와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나의 단면을 쪼개어 나누어 주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합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내 밖으로 꺼내어 놓을 수가 있기는 한가? 그렇게 한다면 나는 팽창해서 터져버릴 것이다. 세상이 아무 이유도 없이 나에게 그토록 모질고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내게는 더이상 나아가야 할 곳도 머무를 수 있는 곳도 없어질 것만 같다. 간단히는 이 세상이 그런 악의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가 않다. 그러니까 자신의 경험은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고, 이야기가 되지 못하는 것은 거짓말이고, 고로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내 삶은 아무 가치가 없다. 


내가 아주아주 못생기고 추하고 볼품없이 늙었다고 생각했는데 거울을 보니까 오늘도 그냥 평소의 나였다. 너무 어이가 없었다. 그때부턴 뭘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른다. 나는 여전히 젊고 건강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술을 많이 마시거나 약을 많이 먹거나 한다. 약으로 정신이 희미해지면 그제서야 하루내 참았던 허기가 지고 눈물을 흘릴 수가 있다. 마음 한복판에 커다란 강이 흐르다가 모래둑이 무너지는 것처럼 마무리 되지 못한 것들은 철철 넘쳐 흐른다.


괜찮아 지겠지. 이 고통도 언젠가는 끝이 날거야. 어쩌면 내일은 더 나아져서 아이스크림을 먹고싶어질지 몰라. 딸기맛으로.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