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말이 없었었지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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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스토리와 주윤발의 피곤한 날

춤추는 기린 2018. 10. 11. 14:59

<허스토리>라는 영화가 개봉했기에 평화나비에 여러 연대 활동가들의 추천을 받아 근처 시에 나가 영화관에서 그 영화를 보았다. 끝까지 보지는 못했다. 중간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와 전화기의 무음버튼을 눌렀는데도 불구하고 내 핸드폰의 밧데리가 완전히 나가버릴 때까지 주머니를 빛내며 핸드폰이 울려댔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 무슨 일이 잘못 되었을 거라 그래서 나의 연락을 간절히 바라는 누군가를 생각하며 극중 문정숙 사장에게 이상일 변호사가 사장님 참 무서운 사람이라며 무안을 줄 때 영화관을 나와야 했다. 

 

급하게 근처 편의점에서 보조배터리를 사서 끼워놓고 카페에 들어가 음료수를 시켰다. 그 시간동안 핸드폰은 3%가 충전되었고 그 숫자를 확인하고 전원을 켜는 순간 핸드폰은 다시 다급하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반대편에서는 처음 듣는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나를 향해 고함을 쳐대고 있었다.

 

사적인 내용이 담긴 통화의 내용까지 소상히 밝힐 수는 없으나 요약컨데 자신의 집에 '인권연대'라는 수상한 택배가 와 열어보니 그 안에 자신이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의 책자와 여러가지 조잡한 물건들이 들어있었으니 나에게 이것에 대해 해명해내라는 전화였다. 자신의 딸 앞으로 온 택배라고 했다. 축제의 기원과 후원의 개념 그리고 텀블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했지만 딸애의 어머니가 듣고싶어하는 말은 정작 따로 있는 듯했다. 나는 오랫동안 통화를 하며 결국 아주머니가 듣고싶어하는 말은 요리조리 피해가며 해주지 않았다. 대신 시종일관 친절하고 상냥하게 응대하려 노력하였고 1시간이 넘게 이어진 통화 끝에 나에게 원하는 답변을 얻을 수 없다는 것에 체념한 듯 수화기 반대편의 사람은 자신은 편견이 없는 이라 소개함을 마지막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그 사이에 영화는 끝이나서 영화관에 딸린 카페의 통유리 너머로 별로 없는 몇명의 관객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수화기를 든 채 지켜보았다. 그렇게 첫번째 관람은 실패로 돌아갔다. 기차역에서 한참 시간이 남은 열차를 기다리며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는 나를 달래어주었지만 계속해서 비척비척 눈물이 흘렀다. 한 개인이 오늘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슬픔과 분노를 마주할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나는 영화 속에 귀순 할매와 순녀 할매에게 푹 빠져 이 영화를 꼭 다시 보고야 말겠다고 다짐했지만 어영부영 일상을 살다보니 영화관에서도 허스토리를 쓸어버리듯 비질하였고 직장을 다니는 이들이 그렇듯 나에게도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관람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다시 영화의 끝장면을 보기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서 소주를 놓고 VOD를 다운받았을 때였다. 반갑기도 하였지만 그 일이 있은지 얼마나 되었다고 흥행하지 못하고 헌 물건처럼 팔려나오게 된 신세가 딱했다. 퉁퉁 부어 매질을 당한 소처럼 튀어나온 눈을 하구서 소주에 취해서 벌렁 누워있다가 나의 SNS를 통하여 영화를 보면 영화값을 주겠다고 하여 세 명을 가려받아 그들에게 관람권을 선물해주었다. 그날은 그렇게 뿌듯하지 못한 성취감과 욱여넣은 소주냄새 함께 잠에 들었다.

 

다음에 또 SNS를 통하여 서울 어디 극장에서 이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배우도 모셔놓고 재상영을 한다하였을 때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알람까지 맞춰놓고 쓰지 않던 인터넷뱅킹 어플도 업그레이드하여 기다렸다가 예매를 하였다. 나의 줄은 두번째 오른쪽 끝자리에 있었으므로 배우와는 가까웠고 내 티켓팅도 성공적이었다. 

 

영화 상영을 마치고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구름 흐르듯 하구서는 대뜸 자신이 불의한 선동에 피해자라는 남감독의 말에 어쨌든 그리 말이라도 가능한 입장이라는 것이 참 편리는 하구나 하고 짜증을 내었다가 그만두었다. 순녀 할매의 하얀 머리칼에 정신이 다 뺏겨서 그런 것을 오래 품어둘 이유가 없었다. 또 독실한 개신교인인 듯한 나의 여배우는 반짝이는 플랜카드를 보면서 우리가 인간을 위해 피흘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보다 배우인 저를 더 사랑한다는 것을 정정하려 하였기에 꼭 첫사랑을 교회에서 치르는 그리스도교 레즈비언들처럼 모를 수가 없는 찜찜한 기분으로 이어지는 사인회에서 나는 오래도록 순서를 기다렸다. 차례가 오자 나는 순녀 할매가 아닌 지금보다 더 어릴적에 몇번 아르바이트로 겪어본 고단한 촬영 현장에서 노동하는 배우를 사랑하고 위한다는 마음을 어떻게든 전해보고자 초상화며 플랜카드며 또 화관이며 국화차며 백화점을 두바퀴 돌아 고른 겨울용 두툼한 스카프와 좀 비싸서 살까 말까 고민하다 이런 기회도 없을거 같아 구입한 양산까지 한지에 곱게 포장하여 내밀었다. 내 것은 책상 위에 올려져있다가 나중에 매니저가 싸가는 것을 영상으로 보았다. 나는 기차시간 때문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뒷줄에서부터 부러 오래 보고자 기다리는 동안 그 배우는 자신에게 사인을 받으러 온 어린 여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다정하게 샅샅히 물어보고는 그 이름의 뜻풀이를 통하여 딱히 할말이 없는 몇초의 사인하는 시간을 보내는 듯하였다. 나는 그 분에게 듣고싶언 보다도야 하고싶은 말이 훨씬 많은 괴상하고 못난 자였으므로 "네 이름이 누구누구에요?"하는 말을 흘러넘기고는 선생님 티비에서 자주 뵙게 해달라고 두 번을 애원하듯 매달렸다. "대중작품을 많이 해달라구? 그래그래."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찍고 또 찍고 가져간 쇼핑백에서 화관을 꺼내어 써달라 청하여 찍고 또 찍었다. 그것도 모잘라 곁에서 좋은 카메라로 찍고 있는 다른 이에게 사진 좀 많이 찍어주십사 고개 조아려 약속까지 받았다. 속으로 못난 것이라고 미움을 받아도 선생님이야 늘 우리를 티비로 보시지마는 저는 선생님 뵐 겨를이 없잖아요 하구서는 모른 척 하였다. 내 마음이 그랬다는 이야기다.

 

그 주부터는 일상으로 돌아와 내가 일하는 사무소에 큰 확장 공사를 하게 되었다. 온갖 잡부와 배달기사 그리고 어쩌고 하는 업체 사장들이 들어갔다 나오고 하는 와중에도 나는 가구 조달을 맡은 업체가 영 뻣뻣하였다. 맞춤을 해야하는 책장을 짜는데 실수투성이인 인부를 자꾸만 보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은 우리 여자 사장에게 머리 조아릴 줄 모르는 그네들 남사장이 영 내 마음에 내키지 않음이 더 크다. 은근슬쩍 내 상사를 깔볼 때마다 꼭 내 책을 보이는 것 같아 나는 그런 실랑이가 오갈 때면 돈 주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겁이나 모진 말 한번 못 뱉는 우리 여사장이 미워 키보드 주판에만 얼굴을 박았다. 하루는 모두 점심을 먹으러 가든지 담배를 피우러 가든지 어디론가 가 버리고는 혼자 사무실에 남아 핸드폰 화면에 코를 박고 만화책 읽기에 열중하고 있는데 그 치가 오더니 시키지도 않은 물건을 갖고와 어디다 놓아야 하냐고 묻는 것이다. 나는 퉁명스럽게 담당자랑 통화도 안하고 왔습니꺼 하고 어른 남자의 걸죽한 말투로 응대하였고 조막만한 계집년에게 받아본적 없는 하대를 받은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허 참하고 막힌 숨 트는 소리를 내더니 성인 두명은 들어야 할 뻡한 나무 판을 사무실 앞에 두고는 쌩하니 가바렸다. 그는 아마 내가 나긋나긋히 저를 사무실로 불러 글쎄요 어디가고 안 계시네요 잠시 기다리세요 하며 종이컵에 커피라도 타다 내줄 줄 기대했나보다.

 

주말에 있어야할 부산퀴어문화축제가 그만 태풍 비바람에 취소되고 다음 주로 밀려서 부산국제영화제 오픈토크에 참석하려는 일정도 틀어졌다. 나는 내내 트위터의 타임라인을 새로 고침하며 올라올 여배우의 사진을 애타게 찾았다. 내심 요즘 유행한다는 '조공인증'이라도 해주지 않으려나 하는 이기심이 스믈스믈 있었다. 그러나 배우는 영화제 내내 아주 세련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고 내가 내민 그 어떤 초라한 것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은색의 드레스에도 털털하게 차려입은 해링본 자켓에도 검은 수트 차림에도 환갑이 넘은 여배우는 그녀 만의 특유의 권태함을 담은 표정으로 희고 아름다운 얼굴을 화면에 비추는 동안 끊임없이 내 안에 순녀 할매들을 우습도록 하였다.  

 

가지지 못하도록 허락된 것은 화가나지 않는다. 나는 괴벨스에 대한 남감독의 궤변에도 내 말투에 혀를 차던 남사장에도 심드렁히 그들을 조소하였을 뿐 진심으로 미워하지는 못하였다. 그것을 미워할 수 있도록 허락되지가 않았다. 대신에 독일문학을 전공하여 그 시절 유학까지 다녀온 여자 희극 교수가 얼마나 잘 살았을 것이며 얼마나 고고하고 얼마나 아름다우며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모로누워 책을 읽으면서도 생각하고 업무를 하면서도 자꾸 생각하였다. 서울대가 아니면 계집은 서울로는 못 보낸다는 말도 안되는 2천년 초반의 우리 집안만의 것이 아닌 규율을 떠올리며 시기이기도 하고 열등이기도 하였지만은 실은 이것은 연애의 감정이었다. 불현듯 그녀가 얼마나 독실한 개신교인인지를 생각하고나면 가슴은 편편히 무너져내렸다. 웃기고 같지않은 일이다. 

 

여교수는 나의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았다. 아니 애당초 여교수의 나이가 우리 어머니보다 많은 것이나 그녀나 나나 같은 구성을 되어 짝이 맞지 않는 것이나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다. 다만 나의 마음 속에 어느 신인 남배우처럼 감사하다 거듭 말해주지 않았던 것에 대한 아쉬움이 문제였다. 왜 그리하여아 하는가 여교수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오직 내가 여교수가 같은 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에서 나의 마음에 이러한 열등의식과 사모의 감정이 싹트는 것이 진저리 나게 싫다. 그 교수의 말에 미안하다는 말은 할 줄도 모르는 듯 생겼던 남감독이 수많은 여성관객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어 용서를 구하는 것을 사진으로 보고나서는 나는 더더욱 미움과 사랑에 피로해졌다. 그렇다. 그것은 허락된 미움이었다. 아니 허락되지 않은 미움이었는데도 그렇다고 믿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육체가 고문처럼 느껴지고, 그럴때면 그가 나를 며느리 대하듯 하대하고 구박하되 따스한 살결의 한부분만이라도 연인처럼 내주었으면 좋겠다는 미친 상상에 까지 이르자 머리를 털고 약을 먹고 잠들었다. 나는 억척스레 큰 목소리를 지닌 여자로 늙어가게 될 것이다. 내게도 늘씬한 처녀 시절이 있었음을 볼 때마다 입에 달고사는 어리석은 건망증 환자가 될 것이다. 예의 그 영화판이라는 그 세계가 뭔줄도 모르면서 겁도 없이 뛰어들어 내 심신을 털이 많은 남자들의 육체에 짓이겨질 용기가 있었을 시절을 되짚어도 혹은 그 이후 그것을 투쟁하는 삶을 살았어도. 나는 이러한 역사에 남을 일을 아주 많이 하였단들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무의미하고 서글픈 일이다. 우리는 익명으로 남아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여교수 앞에 나의 소담하고 과감한 업적들을 늘어놓고 세세히 설명해주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것만이 나는 샘이났다.